두 번이나 읽으면서 유럽이 한번쯤 가보고 싶어진 책. 기자 친구가 추천해줘서 읽었던게 국가란 무엇인가 였고, 이후 처음으로 유시민 작가를 기준으로 검색해서 책을 읽던 중에 티비에도 출연하셔서 더 인지도가 높아지셨다!
200자 원고지 100장에 달하는 항소이유서. 26살에 나는 뭘 했나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본인은 글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아 그리 좋은 글이 아니었다고 한다. 구글 검색하면 나오기도 하고, 따로 책으로도 있구나!
https://namu.wiki/w/%EC%9C%A0%EC%8B%9C%EB%AF%BC/%ED%95%AD%EC%86%8C%EC%9D%B4%EC%9C%A0%EC%84%9C
무튼 공대 출신의 무지한에게 국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던 사람의 관점으로 민주주의의 근원을 보거나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
# 아테네
> 성벽은 두려움의 건축적 표현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룬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꼇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오늘의 화려한 성공이 내일의 몰락을 가져올 비극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 아테네 민주주의는 주권자가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 하나 말고는 민주주의라고 할만한 요소가 없었다. 인권, 개인의 자유, 만인의 평등 같은 기초적 원리가 정립되지도 않았고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장치도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런 정치제도가 다수의 폭정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 도시국가 아테네가 인류에게 남겨준 가장 귀중한 유산은 플라카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말과 논리의 가치, 표현의 자유가 지닌 의미에 대한 각성이다. -이성과 논리를 꽃피운 공간, 플라카
> 폴리스가 정단한 절차에 따라 내린 결정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가 그렇게 할 경우 폴리스가 존속할 수 있는가?
>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장과 쇠락과 죽음, 그리고 일시적 부활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독 당근즙을 마시는 행위로 자신이 던진 철학적 질문에 대답했다.::
>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아테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 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갔던 곳만 가려고 하는 내 성향과 비슷한 개념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왜 그랬던 걸까. 아마 겁이 많은 성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했던 일만 하면 새로운 상황에 놓일 때 겪어야 하는 불편한 과정들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근육의 문제처럼 사용하지 않아서 새로움에 대한 감각이 많이 부족해진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가지를 계속 하는것이 도움이 될 때가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글을 적고있는건 내가 경험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일까. ‘능력 부족으로 인한 부작위의 결과’ 라는 표현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 로마
> 콜로세오는 로마 정치체제 변화의 결과이며 상징이었다. 공화정 시대에 시민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인들의 격정적인 연설을 들으며 자신을 대표할 공직자를 선출하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정시대에는 모든 것을 황제와 소수의 권력자에게 맡겨둔 채, 콜로세오의 잔혹한 검투를 보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다가 패배한 검투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 여부를 두고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관객으로 살았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것이다.
콜로세오에서 진행한 잔혹한 검투는 지금 시대에 언론에 의한 다양한 가십거리들로 바뀌었을 뿐 이천년의 세월동안 변한점이 없구나.
> 폐허가 된 원로원 마당에서 절충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했던 인간 카이사르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떠한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했지만 민중의 소망과 요구를 존중했다. 원로원의 부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빈민과 해방 노예, 속주의 민중을 돕는 개혁 조처를 밀어붙였다. 보기 드문 정치적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개념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맞춰 한쪽으로 치우치기 보다는 상황을 바라보고 필요한 것들을 해나가던게 카이사르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 이스탄불
> 콘스탄티누스 :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지만, 도시가 사라지거나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족만의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민족, 상이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제국이 되었고 이스탄불은 그런 제국의 수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이스탄불에는 투르크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쿠르드인이 섞여 살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다
요즘 정치 관련 뉴스를 보고, 사랑을 경험하다 보니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과의 다른 의견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는게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다양한 종교, 문화, 인종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세계에서 많은 양상으로 그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스탄불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어 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것, 둘째는 터키인이 아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이다.
>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을 잡았다가 최후를 맞은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 터키공화국을 세움.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순적인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지식인이었으며, 공화주의자였지만 강력한 독재를 했다. 쿠르드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냉혹하게 처형했으며,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야당을 해산하기도 했다.
> ‘세속국가론’ ‘공화주의’ ‘ 터키민족주의’ 150만 그리스인이 떠남, 1955년 민족주의 광풍으로 소수민족 말살.
카이사르와 비슷하게 모순된 인물이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모순 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 가지 명제에 대해서 양쪽 극단의 방향을 설정하고 어느쪽인지 정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기반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말이니까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현실 속에서는 그 두 지점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있는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른 결정을 내리기도 하니까. 이런걸 보면 사람이라는게 참 모순적인 동물인게 맞는 것 같다.
확실한건 어느 한 방향을 고집 하는 것 보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 상황에 맞는 태도를 보이는 방법이 두 사람의 공통점 이라는 것이다.
H4. 파리
>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셸다리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 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관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아ㅗ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닐까. 생 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 (1961년 10월 17일 알제리 사람 3만여 명이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집회 시위, 무력진압 과정에서 수백명이 죽고 1만명 넘게 체포)
민주주의가 정치 형태의 끝일까? 한명의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 에서 지방 영주가 다스리는 봉건제를 거쳐 시민이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진화해온 다음엔 뭐가 있을까.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지금의 건설현장 안전관리가 처한 문제점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어느 시점을 넘어서 극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다소 변태적이라고 할만큼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다보면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많은 규칙들이 암덩어리처럼 자라나 다시 개인의 행동 반경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이 올바른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 오버 투어리즘 :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관광객이 관광지에 몰려들면서 관광객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
> 루브르에서 샹젤리제 거리로 가려면 카로젤 개선문을 지나게 된다. 중략, 파리의 심장부인 이 공간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정치 체제의 교체가 도시의 공간을 어덯게 바꾸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앙리 4세가 문을 연 부르봉 왕가의 권력 중심지는 루브르 궁전이었는데, 루이 14세가 1682년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를 했다.
> ‘과시적 소비’의 전형이었던 베르사유 궁전과 부르봉 왕가의 생활방식은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유럽 군주정 국가의 유한계급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저마다 베르사유를 본뜬 짝퉁 궁전을 지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의상을 흉내 내고 프랑스말을 배웠다.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제국 황제가 보스포루스해협에 짝퉁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파리의 패션산업이 그것 때문에 흥했던 것은 아니다. 대혁명으로 문명사의 새 시대를 연 프랑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중하는 정치제도와 사회풍토를 형성하고 역사가 남긴 문화자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펠탑이다.
>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1. 과학혁명의 산물
2. 공화정 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
3.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
움직여라, 당신의 뇌가 젊어진다-안데르스 한센 (1) | 2022.11.24 |
---|---|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0) | 2022.02.13 |
걷는 사람, 하정우 (0) | 2022.02.13 |
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1) | 2022.02.07 |
아메리칸 더트: 독서의 순기능, 간접 경험 (0) | 2022.02.06 |